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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도서실

제목
명상으로 향하는 단계적인 가이드(“The Path of Meditation")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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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0
조회수
262
내용

여기에 내 놓는 글은 오쇼의 “The Path of Meditation",

"명상으로 가는 길;  명상으로 향하는 단계적인 가이드”에서 발췌한 것으로,

1964년, 인도의 ‘마하비레쉬바‘에서, 오쇼가 직접 리드하셨으며, 두 번째로 열렸던 3 일간의 명상 캠프에서 하셨던 말씀의 기록입니다.

한국에 오시는 아쌍가가 이 책을 토대로 이곳에서 명상 캠프를 여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촉박한 시간을 앞에 놓고 서툴게, 거칠게 번역이 되었지만 내용은 되도록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글에서 보실 수 있는 모든 오류는 번역자에게 있습니다.



                                                         번역자 탐라시    




제 1 장 : 명상의 기초


나는 우선, 그대가 신성에 대한 갈망을 가졌기 때문에 그대를 환영 한다; 그대가 평상 생활을 넘어서는 구도자의 길로 향하는 열망을 가졌기에 그대를 환영하며, 그대의 세속적인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기 때문에 그대를 환영한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은 행운아다; 수백만의 사람들 가운데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진리를 갈망한다.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 하지만 진리를 갈망하는 것 역시 대단한 축복이다.  그대가 비록 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괜찮다, 하지만 그대가   목마름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대단한 불행이 될 것이다.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그대가 그것을 염원하는 데 있다, 그대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하는 것, 그대가 열심히 노력하고 갈망하는 것, 그리고 그대가 작심을 하고 그 끝을 향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목마름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면 - 그것이 더 큰 비극이 될 것이다.

갈망은 그 자체에 즐거움이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이라면 그대가 그것을 가지게 될지라도 그곳에 즐거움은 없다; 그러나 그대가 중요한 것, 궁극 적인 것을 염원했는데 그것을 얻지 못했다면, 그때에도 그대는 즐거움으로 충만해 질 것이다.

신성은 그대가 이것을 구하고자 하는 강열도에 의해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씨앗은 이미 그대 내면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라나기 시작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그대가 그대의 목마름에 약간의 온기를, 그대의 목마름에 약간의 열과 불기를 줄 때에만 자라나기 시작을 할 것이다.

그대가 신성에 대해 열망하면 할수록, 그대 가슴에 숨겨져 있는 씨앗이 자라 날 가능성이, 이것이 움트고 신성이 될 가능성이; 이것이 움트고, 이것이 꽃 피어날 가능성이 더 커 질 것이다.

그대가 신성을 경험하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면, 그대가 침묵에 대한, 진리에 대한 욕구를 가져 본 적이 있다면, 그대 내면에 있는 씨앗이 싹 트려고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라.  이것은 그대 내면에 숨겨진 어떤 목마름이 있고 그것이 충족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대 내면에 아주 중요한 투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그대는 이 투쟁을 도와주고 보조해 주어야 할 것이다.  아직은 씨앗이 움터나기에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조 해 주어야 한다: 더욱더 자양분이 많은 환경이 필요하다.  그리고 씨앗이 움터 나온다고 해도, 이것이 또한 꽃을 피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욱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땅에 뿌려지는 많은 씨앗 중 단 몇 개만이 나무가 될 것이다.  그것들 모두에게 가능성이 있다: 그들 모두가 움 터 나올 수 있고 나무로 성장을 하고 각각의 나무들은 다시 더욱더 많은 씨앗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하나의 조그만 씨앗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숲을 만들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 나무들로 전 지구를 덮을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이 막대한 힘과 잠재력을 갖고 있는 씨앗이 파괴되고 거기서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씨앗이 갖는 능력이다 - 인간은 이보다도 더 큰 것을 할 수 있다.   한 조그만 돌이 원자 폭탄을 만드는데 사용 될 수 있다면...막대한 에너지가 그것으로부터 생성 될 수 있다.  누군가 그의 인간성 안에, 그의 의식 안에 이러한 용해됨을 경험했을 때, 이 꽃 피어남, 이 폭발, 에너지와 빛은 바로 신성에 대한 경험이다.  우리는 신성을 밖으로부터 경험하지 않는다.  이 의식의 폭발을 통해서 생산되는 에너지, 우리 인간성의 꽃 피어남, 그 에너지 자체가 신성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 에너지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환영한다.

그러나 그대가 그냥 이곳에 왔기 때문에 그대가 이 목마름을 꼭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이곳에 구경을 하기 위해서 왔을 수도 있다.  그대가 어떤 희미한 호기심을 갖고 이곳에 있을 수도 있다 - 그러나 표면적인 호기심으로는 아무런 문도 열리지 않으며, 어떤 비밀도 단지 구경꾼에게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인생에서는, 사람이 받는 모든 것은 지불을 해야만 하고,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호기심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왜 호기심이 그대를 아무 곳으로도 데려다 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호기심은 그대를 명상으로 들어가도록 돕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자유를 원하는 필수적인 목마름이지, 호기심이 아니다.

그대가 이러한 강열한 열망과 희망을 내면에 가지고 있다면, 그대 내면에 있는 씨앗은 이 엄청난 압력 때문에 깨지고 열리면서 자라나기 시작을 할 것이다.  씨앗은 저절로 움 터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  이것은 많은 압력, 그의 단단한 껍질을 깨고 부드러운 싹이 자라날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보온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이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거기서 나오기 위해서는 단지 호기심만으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기억하라: 그대가 단순히 호기심으로 이곳에 있다면 그대는 그 호기심만을 갖고 이곳을 떠날 것이며, 그대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그대들 각자는 자신이 신성에 대한 진정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자신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진리를 알고 싶은가?”  신성을 향하는 그대의 목마름이 진정한 것인지, 진리를 향하는, 침묵을 향하는, 지복감으로 향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는지가 아주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무엇을 하던 이곳에 있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라; 아무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없을 것이다.  그대의 의미 없는 노력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 할 것이고, 명상도 반응을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대만이 이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그대 내면에 있는 진정한 구도자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분명히 할 것은: 그대는 진실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찾을 길은 있다. 

1. 자신에게 물어 보라, 그대의 목마름이 진정한 것인지를...

2. 그대는 자주 무엇인가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하지만 그대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될 것에 대해서는 희망적이 아니다.  첫 번 단계를 희망적으로 받아들이면, 마지막 단계도 희망적  으로 끝 날 수 있다.


                                 - excercise -

“나는 절대적으로 비어있게 될 것이다, 이 비어있음을 잡고 있을 것이다.” 아직 숨을 들여 마시지 말라, 그리고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이 문장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여 마시기 시작한다.  숨을 들여 마시고 내 쉬는 것이 한 바퀴다.  모든 이들이 천천히, 그리고 단계 단계로 이 과정을 따라야 된다.  이것을 다섯 번 한 다음 그대의 등을 똑바로 피고, 천천히 숨을 쉬면서, 조용하게 앉아서 오 분간 이완한다.   이 오 분 동안에 그대가 만든 결심이 그대 내면으로 깊게 내려 갈 것이다.





제 2 장 :   육체로부터 시작하라


명상을 대하는 나의 접근은 어떤 책이나, 어떤 특정 학교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걸었던 길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내면으로 가면서 알아진 것들에 대해 말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그대들에게 시험해 보라고 말할 때에는, 나는 그대가 갈구하는 것을 찾는데 있어 그대 역시도 성공을 할 것이라는데 의심이 없다.

나는 어느 기간 동안 강열한 괴로움과 고통을 거쳐야 했었다.  나는 시험과 잘못의 기간들을 거쳐야 했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나는 내 내면으로 들어가는데 고투를 했다.  나는 이 방향으로의 모든 길을, 모든 작은 길들을 시험해 보는데 계속 된 노력을 했다.

그 날들은 아주 아픈 날들이었고,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 찼었다.  그러나 계속된 노력이 있었고, 그리고 이러한 노력 때문에 - 마치 큰 폭포가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계속되는 물의 흐름으로 해서 바위마저도 깎아나가는 것처럼 - 그렇게 폭포처럼, 계속된 노력으로, 어느 곳에서 나는 열린 문을 찾았다.  그래서 나는 이 열린 문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보장을 갖고, 만약 그대들이 이 방법을 시도한다면 결과는 절대적으로 보증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한때는 아픔과 슬픔이 있었지만, 지금은 내 내면에 아무런 아픔도 슬픔도 없다.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른 종류의 슬픔을 경험한다,  내 주위에서, 큰 고통을 가진 것같이 보이며, 많은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지만, 그곳에는 그처럼 간단한 해답이 있고 그들의 아픔과 고민이 아주 쉽게 없어 질 수 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문을 두드리면 문이 아주 쉽게 열리게 될 것이라고 느낀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해답 바로 앞에 서 있으면서, 울고 있다.    -  장님과 뱀의 이야기 -

그들은 손에 작대기가 아닌, 뱀을 가지고 다니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질투 때문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이상해 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는 그대가 잡고 있는 것이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무엇인가 더 높은 것을 잡으라고 말하고 있다.  삶에서 더 큰 기쁨이 경험 되어야하고,  더 큰 진리가 이해되어야 한다.  그대가 지금 잡고 있는 것은 단지 그대를 파괴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했던 목마름은  그대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 절대적으로 잘못되었고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만 일어 날 것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삶에 대해 생각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에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처럼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들은 계속 떠다니며, 강이 그것들을 옮기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삶에 대해서, 그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그대가 방향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대가 강을 떠다니는 한 조각의 나무토막의 삶을 살 것인지, 바람이 부는 대로 날라 다니는 낙엽처럼 살 것인지, 또는 한 개인으로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인생에서 방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자신의 손안에 그의 삶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살 것인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창작은 그 자신이다;  그에게 가장 위대한 창작은 그 자신의 각성이다.  그 이외에는 그가 무엇을 만들어 내었던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는 마치 물위에 선을 긋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만들어 내는 것, 그가 자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돌 위에 조각을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결코 지워질 수 없고, 영원히 그와 함께 할 것이다.

삶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한 목적이 없다면, 사람은 아무 곳에도 도달 할 수 없다.  그대가 이에 대해 생각하고, 이것을 반영해 보고, 이것을 명상할 때에만 의식적인 목적에 대한 목마름이 일어 날 것이다. 


          - 부처님이 어떻게 구도의 길에 들어섰는가에 대한 이야기 -


그대가 궁극의 의식을, 신성을, 그대 내면의 인간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에 나의 이해가 왔다.

하나는 환경이다, 명상을 하는 환경이다.  다른 하나는  명상의 중심이다 - 명상의 환경과 명상의 중심;  또는 이것을 명상의 육체와 명상의 영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오늘은 명상의 환경에 대해서, 내일은 영혼 또는 중심에 대해서, 그리고 모래는 명상의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다.  바로 이 세가지: 명상하는 환경, 중심 과 명상의 열매.  다른 말로 하면, 명상의 기초, 명상 자체와 그것의 충족이다.

명상의 기초는 단지 그대의 주변을 말한다, 그리고 그대 성격의 주변은 육체다.  그래서 명상의 주변이라고 말 할 때는 단지 육체를 말한다.  그래서 명상을 향하는 첫 번째 단계는 그대의 육체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 할 것은, 그대가 육체에 대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대에게 날인 해 놓았을 수 있는 부정적인 느낌이 무엇이든지, 그것들을 버려 버리는 것이다.  정신적인 세계에서는 물론 물질적인 세계에서도 육체는 다만 기계다.

육체는 원수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기계이기 때문에, 그대가 나쁘게 쓸 수도 있고 좋게 쓸 수도 있다.  이를 통해서 그대는 물질적인 삶으로, 또는 궁극적으로 들어 갈 수가 있다: 육체는 그대가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는 그처럼 신비하고 그처럼 특별하다.  세상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이것은 육체를 통해서 일어난다.  육체는 오직 수단이며, 기구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을 위해서는 육체에 주의를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선 이 기계를  잘 정돈하지 않고는 일을 진행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육체가 좋은 컨디션에 있지 못하면 그대는 앞으로 나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첫 번 단계는 육체를 순화시키는 것이다, 육체가 순수할수록, 내면으로 깊이 들어    가는 것이 쉽게 될 것이다.


육체를 순수화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첫 번째 뜻은 육체에, 육체라는 조직에 어떤 혼란도, 막힘도, 복합성도 없어야 한다 - 그러면 육체는 순수하다.

어떻게 복합성과 막힘이 육체로 들어갔는지를 이해하도록 하라.  육체에 아무런 막힘이 없다면, 육체에 어떤 혼란도 없다면 그리고 그곳에 어떤 문제도, 어떤 방해도 없다면, 그러면 육체는 순수하고 그대가 내면으로 들어가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분노에 차 있다면,  그대가 분노에 차 있으면서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이 만들어 내는 열이 그대 육체 내면의 어느 부위에 축적이 되고 이것은 막힘이 될 것이다.  그대는 분노가 어떻게 히스테리가 되는지를 보고, 어떻게 병을 가져다주는지를 보았을 것이다.  최근의 인간 육체에 대한 연구에서 보면 백 개의 병중 반은 육체의 병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신적인 병은 육체에 혼란을 가지고 오며, 육체에 혼란이 오고, 육체가 건강하지 않으면, 육체의 전체 시스템은 굳어지고 불순해진다.

육체를 순수하게 하는 해결책은 한 달에 한번이나 두 번씩 자신을 방에 가두어 놓고 그대 육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든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대가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로 춤을 추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그렇게 반시간 정도 뛰고 나면, 아주 이완되고, 조용하고, 신선하게 되는 것에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육체에 있는 많은 막힘들이 풀려 나갔기 때문이다.


-  두 번째는 새로운 막힘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보아야 한다.

에너지는 중립이다.  분노로 만들어진 에너지는 그 자체로는 파괴적인 것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분노라는 형태로 쓰여 지기 때문에 이것은 파괴적이다.  이것은 더 좋은 쪽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좋은 방법으로 쓰여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계속해서 파괴적인 형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대가 무엇인가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사라질 수가 없다.  그대가 이것을 이용하는 것을 배운다면, 이것은 그대 삶에 혁명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순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막힘 들을 풀어내야 하고, 또 새로운 막힘 들은 창조적으로 변형을 시켜야 한다.  이것들은 두 가지 예비적인 단계이며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요가에 있는 자세들은 육체를 창조적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육체적인 exercise는 육체를 창조적으로 사용한다.  그대가 그대의 육체를 창조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축복이 되어야 할 이 모든 에너지는 저주로 변 할 것이다.  그대 모두는 그대 자신의 에너지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단지 에너지를 가진 것 때문에 문제가 되고 짐이 된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라.  창조적이란 이것이 단지 그대에게 주는 즐거움만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대가 조각을 하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키고 하는 - 그대가 무엇을 하는가에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즐거움을 위해서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파괴적인 에너지는 변형이 될 것이고 창조적으로 될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그대 감정들의 방향을 다시 돌리라고 말하며, 이 평범한 생활에 창조적인 방향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그대는 집 주위에 정원을 만들 수도 있고 화초들을 사랑 할 수도 있고 그것들에게서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인 것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의 삶을 페허로 만들 것이다.

분노는 비창조적인 사람의 표시다.  그대는 그대자신 내면에 그처럼 많은 에너지를 갖고 다닌다 - 이것이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은 쎅스를 통해서, 성적인 욕구로 나올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하든 나와야 한다.

그처럼 많은 창조적인 사람들, 위대한 조각가들, 예술가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가 그들의 창조적인 과정에 쓰여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에너지는 변형되었고, 승화되었다.  이것이 승화되지 않았다면, 최소의 창작적인 방법인, 어린아이를 만들어 내는 일로 쓰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이 이루어지면, 적은 일들은 자동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적은 일들이란:

- 그대는 몸이 노곤해 질만큼의 많은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 음식이 들어가서 그대에게 힘을 내도록 하는 음식이 바른 음식이다.

- 음식은 그대를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

- 음식은 그대를 취하지 않게 해야 한다.

- exercise가 육체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제 3 장   삶의 질을 찾으라


질문: 구도자가 빛을 보았다면, 이 경험을 어떻게 보살펴야 합니까?


그대가 경험하는 즐거움이나, 평화나, 행복 어떤 느낌이든지, 그대는 계속해서, 하루 이십 사시간 동안 그 느낌들을 내면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는가?


- 한 가지 방법은 

그대가 명상을 하는 동안 그대가 경험 한 이 특별한 의식의 상태를 기억하고 다시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대가 하루에 열 번 또는 열 다섯 번 정도 이러한 경험을, 일 이 분간만이라도 기억을 하게 되면, 이것은 점 점 더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대는 그것을 기억 할 필요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대에게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을 그대의 생각 속으로, 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하라.

- 두 번째 방법은

그대가 밤에 자리에 들 때,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대의 결심이 강해지도록 하는 방법은,   또한 그대의 명상 상태가 계속 되도록 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대가 명상 경험을 했다면, 그날 밤, 그대가 자리에 누웠을 때, 앞서 말한 똑 같은 exercise 를 한다: 그대가 명상을 하는 동안 경험했던 것이 무엇이든 내면으로 불러오도록 하면 같은 경험이 하루 이십 사 시간 그대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대가 침묵의 상태를 경험했다면, 같은 과정을 이용한다, “무엇이든 그대가 명상을 하는 동안 느꼈던 것이 내면에 흐르는 전류처럼 항상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다.  이런 생각을 반복 하므로서 노력을 하지 않고도 그대는 명상의 느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exercise를 하면 경험의 기억이 그대 의식 내부로 더욱더 깊이 들어 갈 것이고, 이것을 번복해서 다시 또 다시 기억하게 되면 이것은 그대의 의식 안에 영원한 일부분이 될 것이다.

아주 흔히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만 기억을 하는 잘못을 저지르며, 긍정적인 것은 모두 잊어버린다.   그래서 그것들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은 위에 말한 두 가지 방법이 그대를 도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기억들을 기억해 내므로서 그것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그대의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 미래의 길을 닦는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 할 때, 이 생각이 우리 내면에 변화를 가지고 오고 이것이 우리의 삶 전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좋다고 생각하고,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하라.

그대의 의식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대의 삶 자체도 똑 같은 질을 갖게 될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순수하게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을 때, 전 세계가 그에게 친절한 장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전 세계가 그에게 사랑을 뿌려 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진리다: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은 미움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이십 사 시간 동안 그대 삶에 있었던 귀중했던 순간들을 기억 해 보도록 하라.  그 몇 순간들을 다시 불러오고 그것들이 그대 삶에 기반이 되도록 하라.

그렇게 되면, 차츰, 그대가 기억하는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대가 항상 열망하는 것들이 그대 주위 전체에서 나타나기 시작을 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완전히 다른 빛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같은 사람이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같은 눈, 같은 꽃과 같은 돌이 다른 뜻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에서 경험했던 것을 기억하라 - 밝음, 빛, 평화.   어머니가 그녀의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것처럼, 조그만 경험들을 보살피라.  그대가 그것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그것들은 죽어버린다.

의식의 상태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큰 보호가 필요하다.  경험이 귀중하면 귀중할수록, 더 큰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대가 아주 조그만 경험을 했더라도, 그것들을 잘 보살피라.


질문: 사람이 분노하게 될 때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 몸 전체에 영향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몸에는 어떤 막힘 들이 생깁니까?


나는 그대에게 분노를 하나의 예로서 말했다.  모든 감정은 에너지다, 그리고 이 에너지들이 창조적으로 쓰이지 못할 때 그것들은 육체의 어떤 부위에, 마음의 어떤 부위에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에너지는 쓰여 져야 한다.  내면에 있는 에너지가 쓰여 지지 않고 있으면 어떤 방해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방해들은 병이 되고, 종양이 될 것이다.  이것은 분노만 그런 것이 아니다 -  내 내면에 주고자 하는 사랑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이 사랑을 줄 수 없다면, 이것은 내 안에서 방해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내 안에 분노가 있는데 이것을 표현 할 수 없다면, 이것은 내 안에서 방해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내 안에 두려움이 있는데 이것을 보여 줄 수 없다면, 이 두려움은 방해가 될 것이다.  모든 감정적인 상태들은 내면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이 에너지는 방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분노했을 때, 이 사람에게 있어 부정적인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누군가를 때리거나 욕지거리로 그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에너지는 사용되었지만 그는 그것으로부터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했다.  단 하나 그가 수확한 것은 그 사람이 더 큰 공격을 가해 오는 것이다.  분노가 부정적으로 사용이 되면, 그때 이것은 더 큰 분노를 만들어내고 에너지는 낭비 될 것이다.  다시 분노가 만들어지고, 부정적인 습관 때문에 더 많은 분노가 생성 될 것이다.  다시 에너지가 낭비될 것이고 다른 사람의 반격으로 해서 또 다시 분노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분노는 오로지 그대가 이것을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쓸 때만 그쳐 질 수가 있다.  내가 분노를 일으킬 때마다 이것은 나를 약하게 만들고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써 버린다.

그대는 동물들의 눈을 본 적이 있는가?  가장 사나운 동물일지라도  그대들의 눈보다는 부드럽다.  왜 그런가? - 이것은 그들에게는 억제되어 있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린아이들의 눈에서 부드러움을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들이 느끼는 대로 표현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에너지는 어떤 방해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의 삶에는 억제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혼란이 시작된다.  에너지의 막힘은 내면의 복잡성을 반영한다. - 무엇인가 내면에서 일어났는데 그대는 밖으로는 다른 것을 표출한다.  그러면 표출되지 않은 에너지는 어디로 가겠는가?  이것이 에너지-막힘이 된다.

내가 에너지-막힘이라고 뜻하는 것은 이것이 그대의 마음에 또는 그대의 육체에서 매듭처럼 붙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강에서 물의 한 부분이 얼기 시작하고 얼음 조각들이 강물에 떠다니는 것과 같다.  그 조각들이 점 점 더 커지면, 강의 흐름은 점 점 더 막히게 된다.  모든 물이 얼어 버리면 강은 완전히 흐르는 것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대도 떠돌아다니는 얼음 덩어리를 갖고 있는 강과 같다.  이 얼음을 녹여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에너지-막힘들은 그대의  삶이라는 시냇물에 떠돌아다니는 얼음 덩어리와 같다.  미움의, 분노의, 쎅스의 억제된 충동들이 그대 내면에서 큰 얼음 덩어리같이 되 버린다.  어떤 사람의 삶은 완전히 얼어 버렸고, 거기에는 흐름이 전혀 없다.  얼음을 녹여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고,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는 오래된 막힘을 가져왔던 충돌들을 보내버려야 하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충동들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가 어린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은 그들 내면에 굉장한 열정을, 아주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 내면에 있는 에너지는 어떤 돌출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막힘들이 그 어린이 안에서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대는 그에게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하도록 말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적인 방법이다.  예를 들면,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유리창을 깨려는 어린아이에게,   진흙 덩어리를 주면서 ‘이것으로 유리를 만들라.  이 유리창에 있는 유리와 똑 같이 유리를 만들라.’ 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에너지의 창조적인 사용이다.  꽃을 꺽으려는 아이에게 종이를 주면서, “이것과 똑 같게 꽃을 만들라.” 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에너지의 창조적인 사용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것은 에너지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다.  분노의 에너지까지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이것은 어떻게 쓰여 지는 가에 달려 있다.  분노의 에너지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라;  에너지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원자력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이 에너지로 세상 전체가 파괴 될 수도 있고 세상 전체가 창조 될 수도 있다.  모든 에너지는 중립적이다.  이것이 파괴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면 이것은 나쁘게 되고, 이것이 창조적으로 사용되면 좋게되는 것이다.


제 4 장 :     마음을 이해하라


인간 성격의 두 번째 층은 그의 생각이다.  육체가 순수해야 하고, 마음 역시도 순수해야 한다.  세 번째 층은 감정이다, 그리고 감정이 순수해 지면 명상의 기반이 준비된다.  이러한 세 가지 일이 일어났을 때 그대는 대단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일이 완성되었을 때 , 그대는 새로운 삶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지 명상을 하도록 그대를 준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단계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은 외면으로의 실습이다.  내적인 실습은 아직 더 깊다 - 거기서는 우리는 육체가, 생각과 감정들이 순수해 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들이 비어있게 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내 던져 버려야 한다.  외적인 실습에서는 육체가 순수해지고, 내적인 실습에서는 육체를 포기해야 한다.  그대는 육체가 없는 상태에 들어가고, 마음이 없는 상태에 들어가고,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에 들어간다.  이것이 일어날 수 있기 전에 그대 내면에서 우선 불순함을 제거해 내야한다.


무엇이 마음에 있는 불순물인가?

생각이란 변덕스럽다.  생각들 역시도 마음에 인상을 남긴다, 좋다든가 나쁘다는.  한 개인이 생각하는 것 역시 그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  누군가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면,  한 개인이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반영시키고 있다면, 이것이 그의 성격을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 것이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나는 그대에게 그대의 마음에서 어떤 것이 끊임없이 반영되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그대가 항상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대들의 대부분은 돈, 쎅스 또는 권력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이다: 우리의 생각 과정들은 이 세 가지 배 위에서 항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런 배들 중 하나 위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면, 생각들이 순수해 질 수 없다.  그가 이러한 세 개의 배에서 내려 올 때에만 생각들이 순수 해 질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생각들을 지켜보는 일이 중요하다;  그의 생각들이 그 주위를 선회하고 있는 그 마음의 상처가 무엇인지를.  그의 마음에 자꾸 되돌아오는 생각들이 그의 기본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들은 이것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돈인지, 쎅스인지 또는 권력인지를?  그대는 이 중에 하나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는지?  그대는 거짓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가?  그대는 부정직한 것에 대해서, 속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들은 모두 작은 일들이다, 첫 번째 세 가지가 중요한 점이다.  만약 그대의 마음이 이 세 가지를 주위로 해서 선회하고 있다면 그대의 생각들은 불순하다.  그대가 그것들을 생각하고 있는한, 그대가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순수한 생각들이라고 부를 수 없다.

생각의 순수성이란 우리가 인도에서 말하는 진, 선, 미와 똑 같다.  순수한 생각들은 이러한 세 상태에 중점을 둔다.  그대는 진리에 대해 얼마큼 생각하고 있는가?  그대는 진리에 대해서 아예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진리가 무엇인지 호기심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조용한 순간에, 그대의 마음이 이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진리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워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싶다고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다고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그대의 마음이 불순한 생각들로 성가심을 당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대의 마음이 불순한 것이고, 불순한 마음을 갖고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불순한 생각들은 그대를 밖으로 데려가고 순수한 생각들은 그대를 내면으로 데려온다.  불순한 생각들은 밖으로 그리고 밑 쪽으로 흐르고, 순수한 생각들은 내면으로 그리고 윗쪽으로 흐른다.  누군가 진리에 대해서, 선에 대해서, 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이 이러한 것들로 물들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대가 조금만이라도 생각을 한다면, 그대의 생각을 순수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몇 가지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대는 서서히 그대의 아주 적은 행동에까지도 변화가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언어가 비폭력적이 될 것이고, 그대의 움직임이 비폭력적이 될 것이다.  그대의 생각들은 그대의 삶 전체를 변형시킬 수 있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대의 생각들이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대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아주 많은 것이 항상 그대가 생각하는 것에 의존을 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돈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으면서 명상을 하려고 한다면, 그대는 두 개의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는 마치 그대가 두 마리의 물소를 마차 양쪽에 잡아 메고 있는 것과 같다.  마차는 양쪽의 반대 방향에서 끄는 물소의 힘에 의해서 두 쪽으로 부서질 것이고, 앞으로 움직여 나아가지 못 할 것이다.

그대의 생각들이 순수하다면 가장 작은 행동에서조차도 대단한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을 그대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삶이란 대단한 행위들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적은 것으로 만들어졌다.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앉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 많은 것이 이런 것들에 달려있다.  이러한 행동들이 나오는 중요한 근원지는 마음이다.  그래서 그대의 생각들은 진, 선, 미를 향하도록 되어 있어야 한다.  그대 삶에서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회상이 있어야한다.  그대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진리를 반영하고, 선을 반영하고, 미를 반영하라.  그리고 그대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는, 시작하기 전에, 그대가 하려고 하는 일이 진, 선, 미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또는 그것에 상반되는지를 잠깐 생각해 보라.  이것이 상반 될 때는 즉시 이 생각을 그치라.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로울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를 밑으로 끌고 내려 갈 것이며 그대의 삶을 황폐하게 할 것이다.

  

- 첫 번째로 기본적인 생각의 순수함은 그대 생각에서 주 초점이 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 중 어느 하나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면, 이런 실습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대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그대는 세 가지 국면 - 진, 선, 미 -를 알게 되면 놀라게 될 것이다.  그대 내면에서 한 가지 만이라도 활성화되면 다른 둘도 역시 자동적으로 활성화 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하나의 타입은 ‘진리’라는 면에서 빨리 깨어 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고, 두 번째 타입은 ‘선’의 면에서 빨리 꽃 피어나는 가능성을 가졌고 세 번째는 ‘미’의 면에서 빨리 꽃 피어나는 가능성을 가졌다.

그대 각자에게 한 가지 우세한 국면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국면일지라도 활성화 되게 되면 다른 둘도 자동적으로 활성화된다.

그대는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그대의 기반으로 만들 수 있다.  그중 하나에 그대가 흥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그대의 초점으로 하고 그대의 모든 생각들이 이것을 주위로 순회하도록 하라.  그대의 내면성이 이것에 의해 터치되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가 그대의 전 삶을 통해서 연습을 하게 되면, 그대 삶의 모든 측면에서 - 그대의 행동이나 행위에서 - 천천히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가 이것을 실습하면 할수록 그대 삶에 있는 모든 비자연적인 것들과 모든 불순한 생각들이 점 점 더 약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 할 것이다.

나는 그대가 돈에 대한 생각을 그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대가 진, 선, 미에 대해서 더욱더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그대가 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을 하게 되면 그대는 돈에 대해서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돈에 대한 생각만큼 더 더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미’에 대해 생각을 할 때는 그대가 쎅스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쎅스에 대한 생각만큼 더 추한 마음의 상태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그대에게 그대의 에너지를 그러한 상태로 방향을 돌리라고 말하고 있고, 그대는 차차로 그대의 에너지가 불필요한 생각들로부터 돌아오고 그대를 꽉 잡고 있던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생각들을 순수하게 하기 위해서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것은 그대의 마음에 들어온 생각들이 우연히 들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 안으로 들어온 생각들이 그대가 원해서 들어 왔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려야한다.

내가 처음에 말 한 것처럼, 누군가가 그대의 집에 쓰레기를 버렸다면 그대는 그 사람과 싸움을 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대의 마음에 쓰레기를 버렸다면 그대는 그 사람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대의 마음을 쓰레기로 채운다면, 만약 내가 그대에게 영화의 스토리를 이야기한다면 그대는 행복하게 경청을 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이 쓰레기로 채워 질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대들은 서로의 적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서로의 마음에 쓰레기를 던져 넣고 있다.  그대의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대에게 무슨 일들을 하고 있는가? - 아무도 그대의 친구들이 하는 것보다 그대를 더 배반하지는 않는다.  그대의 적들은 그들보다 더 낫다; 적어도 그대의 적들은 서로가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머리를 쓰레기로 채우지는 않는다.

그대들은 서로의 머리 속에 쓰레기로 채우고 있으며, 그대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대의 마음이 여관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대의 마음이 여관과 같고, 잘 보호되지 않는다면, 불순한 생각들로부터 그대가 자유로워지기란 힘들다.  그대는 의식적으로 그대의 마음을 지켜보아야 한다.


- 생각을 순수하게 하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그대의 생각들을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경각심이 있어야 한다.  그대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 보아야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시켜야 한다. 

그대가 그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각들의 움직임을 보게 되면 그대의 생각을 순수하게 갖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불순한 생각들을 알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대의 내면을 안절부절 하게 만들어 내는 생각들은 불순한 생각들이고 그대의 내면에서 평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생각들은 순수한 생각들이다.  그대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생각들은 순수하고 어떤 종류의 혼란을 일으키는 생각들은 불순한 생각들이다.  그대는 이러한 생각들을 피해야한다.  그리고 그대가 계속해서 그대의 마음을 바라본다면, 그대의 생각들은 더욱더 순수 해 질 것이다.


- 세 번째는:  세상에는 많은 불순한 생각들이 있다.  이러한 불순한 생각들이 불을 지르고, 이러한 불순한 생각들에서 나온 연기들이 그대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그대를 에워싸고 그대를 숨막히게 한다.  하지만 잊지 말라 , 그곳에는 아직도 몇 개의 순수한 생각들의 파장이  타고 있으며, 아직도 몇 개의 순수한 생각의 파도가 살아 있다.  이 어두움이라는 전체 대양 속에서 아직도 몇 가닥 빛의 근원이 있다.  이러한 빛에 가까이 가도록 하라.  이것이 내가 사트상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이 아주 어둡지만 이것이 아주 깜깜한 것은 아니다, 몇 개의 램프가 타고 있다.  비록 그것들이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그리고 심지가 작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다.   그대가 그것에 가까이 가도록 해야 하는 것은,  그대가 그대의 불이 켜지지 않은 램프를, 불이 켜진 램프에 가지고 가게 되면, 불이 있는 램프에 가까이 가지고 가는 것에 의해서 불이 없는 램프가 다시 불이 붙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연기가 사라지고 다시 빛나게 타기 시작 할 가능성이 있다.

진, 선, 미를 위해 서 있는 불꽃으로 더욱더 가까이 다가가라.  그대자신을 그것들에게로 더욱더 가까이 가지고 가라.  그런 생각들에게로, 그러한 사람들에게로, 그곳에서 그대의 램프가 불붙을 수 있는 그러한 생각들의 파도 속으로 더욱더 가까이 움직이라.

그대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이것을 할 수 있다:  순수하고 진실 된 생각들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으로서,  순수하고 진실 된 사람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으로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에 가까이 있는 것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자연은 절대로 불순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대가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을 계속해서 보고 있노라면, 그대는 하늘이 그대 안에 있는 불순한 생각들을 고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대신에 하늘은 그대 머리 속에 있는 모든 쓰레기들을 깨끗이 치워주는 것을, 그리고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그대가 이것과 하나가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폭포를 보고 있노라면 그대가 폭포의 일부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녹색으로 가득 찬 숲에 있게 되면 그대는 또한 나무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오직 깨달은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배울수 있는 지성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대에게는 세상 전체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생각들을 순수하게 만들 수 있는 몇 가지를 지적했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들이 그대의 매일의 실습에서 한 부분이 되도록 하는데 이해가 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오늘이나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의 일생을 통해서 실습되어야 할 것이다.

              



제 5 장 :   감정들을 이해하라


감정들은 육체나 생각들보다도 더 깊은 층에 있다.  감정의 순수함은 가장 중요한 질이다.  정신적인 여정에서나 명상에서는, 감정의 순수함이 육체나 생각의 것들보다도 더 유용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생각에 의해서 살지 않고 그의 감정에 의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삶 속에서 그렇게 많은 일들을 생각의 결과로 하지는 않는다, 그대가 하는 것의 대부분은 그대 감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그대가 갖는 미움, 분노, 사랑 - 이 모든 것은 그대의 생각들이 아닌, 그대의 감정들과 관련이 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는 감정과 생각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화를 내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대가 분노는 나쁘다고 생각했더라도 분노가 그대를 사로잡으면, 생각은 옆으로 치워지며, 그대는 분노가 되어 버린다.

감정의 세계에서 변형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저 생각하고 숙고하는 것만으로 삶에 혁명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인 여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점이 감정들이다.


다음의 네 측면으로 감정들은 순수해 질 수 있다.

- 첫째는 친절함.

- 둘째는 자비.

- 셋째는 즐거움.

- 넷째는 감사함.


그대가 이 네 가지의 감정들을 그대의 삶 속에 포함시키게 되면, 감정의 순수성을 달성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의 감정들은 또한 그것에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  친절함의 반대는 미움과 적대감이고, 자비의 반대는 잔인함, 폭력과 불친절이고, 즐거움의 반대는 슬픔, 고통, 괴로움과 걱정이며, 감사함의 반대는 배은망덕이다.  누군가 그의 삶과 감정들이 이 네 가지의 반대되는 측면에 있다면 그는 불순한 감정의 상태에 있는 것이고, 누군가 먼저 말한 네 가지 측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순수한 감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무엇이 그대의 감정들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무엇이 그대의 감정들을 움직이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누구든 어떻게 친절함의 에너지를 깨어나게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면, 그는 단지 적대 감정이 있는 경우에만 힘을 쓰고, 친절해야 하는 경우에는 약해지게 된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역사는 단지 우리가 어떻게 적대감의 에너지만을 생성시켜 왔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는 친절함의 에너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랑은 힘이다.”;  붓다는 “자비는 힘이다.”라고 말한다.  그대는 이것을 듣는다, 하지만 이해를 하지 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대에게 그대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말을 한다.  그대는 어느 때 힘이 있어 보이는가? -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느낄 때인가 또는 누군가에게 평화로운 그리고 사랑에 찬 느낌을 느낄 때인가?  그리고 그대가 적대적인 조건에서 힘을 느끼는 것을 보게 되며, 그대가 의식하고 침묵하고 있을 때는 힘이 없게 느껴지는 것을 보게 된다면, 이것은 그대가 불순한 감정에 의해서 제어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불순한 감정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대는 그대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게 된다.


무엇이 그대 자신에게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가? 

이 중요한 점에 대해서 이해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대의 적대감은 항상 밖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적대감이 그대밖에 있는 누군가에게로 향해서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밖에 아무도 없다면 그대 내면에서 적대감이 일어 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은 밖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고 나는 말한다: 비록 밖에 아무도 없더라도 사랑은 그대 내면에서 아직도 일어난다.  사랑은 본질적이다, 친절함은 본질적이다.  적대감은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이는 다른 사람과 관련이 된다.  미움은 밖으로부터 제동이 되고, 사랑은 내면에서 솟아난다.  불순한 감정들은 밖에서 만들어지고 순수한 감정들은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열정은 밖으로부터 제동이 걸린다.  붓다나 마하비라는 그들의 가슴에 열정이 없다, 그들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램프의 빛과 같다:  아무도 없어도 빛은 계속해서 빈 공간에 비추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나갈 때는 그를 비춘다.  하지만 열정과 욕망은 빛과 같지 않다: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제동이 될 때에, 이러한 에너지가 그들을 향해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열정은 긴장이다.  사랑은 긴장이 아니다.  사랑에는 긴장이 없고, 사랑은 절대적으로 고요한 상태다.

그대의 사랑은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깨달은 이들의 사랑은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 인간성의 상태다.  그들은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해야만 한다.

열매가 가득 찬 나무에 돌을 던지게되면, 대답으로 그대는 단지 열매만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 나무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의 무기력함이다.  그리고 그대가 물이 넘치는 강에 어떤 종류의 물통이던 그것을 던졌을 때, 그 물통이 더럽던 깨끗하던지, 금으로 만들었던 쇠로 만들었던 강은 선택 없이 그대에게 물을 줄 것이다.  거기에는 강이 갖은 위대함이란 없다, 그와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순수한 그리고 불순한 감정에 대해서 첫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순수한 감정은 인간성의 상태이고, 불순한 감정은 비뚤어진 인간성이다  불순한 감정이란 밖으로부터 인간성에 와 진 영향이고, 순수한 감정이란 인간성 내면의 확장이다. 

그대들 모두는 에코(echo)가 울리는 방이다: 그대는 그대자신의 어떤 소리도, 그대자신의 어떤 삶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대는 자신에게 어떤 느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들은 불순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으며, 빌려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첫 번째 열쇠를 기억하라: 감정은 그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반대 작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대 인간성의 상태이어야 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는 두려움을 경험 한다 - 거기에서 미움의 근원이 생겨났다.  사랑의 에너지 근원이 활성화 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근원이 활성화되어 본 적이 없이 죽어간다, 왜냐하면 삶이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 한다: 그것은 역시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욕구다.  사랑은 명상을 통해서만 성숙한다.

이것이 바로 왜 그대의 내면에서 사랑과 친절함의 근원이 발달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에게 발달할 기회를 주지 않는 이 모든 원시적인 본능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발달되어야 한다.  그대가 이끄는 삶은 이것이 자라도록 허용을 하지 않고, 단지 미움만이 발달된다.  그래서 친절함이라고 그대가 부르는 것은 다만 위선이며 예의다.  그대의 친절함이란 다만 미움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한 꾸밈이다.


그대가 어떻게 친절함의 근원을 발달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친절함의 느낌이 그대 내면에서 일어 날 수 있을까?   그대는 끊임없이 그대자신의 주위에 친절함의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  친절함의 메시지를 그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한다.  친절함의 파장이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자신의 내면에 에너지를 주어야한다.  그대는 친절함의 공간을 활성화 시켜야 한다.

그대가 강 뚝에 앉아 있을 때는, 강에게 사랑을 주라.  내가 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일은 좀 더 어렵기 때문이다.  나무에게 사랑을 주라 - 내가 나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자연에게 사랑을 보내라.  자연은 그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에 가슴 쎈타는 자연을 향해서는 쉽게 흐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놀라웠다: 그들은 사랑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보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 그들은 양손을 모으고, “그대에게 영화가 있기를! 그대의 무한한 자비로 그대는 우리에게 빛과 광휘를 줍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사랑의 메시지를 모든 자연에게 보냈다.  그들은 모든 곳에서 기도, 사랑과 헌신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필요하다.  그대가 그대 내면에 사랑의 씨앗이 싹 트기를 원한다면, 제일 먼저 사랑의 메시지를 자연에게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그처럼 이상한 사람들이다: 달이 온 밤 동안 하늘에 있는데 그대는 앉아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를 잃었는지 또는 이겼는지를 계산하고 있다.  달은 저 높이에 있는데 사랑을 위한 아름다운 기회를 무의미한 것으로 놓치고 있다.  달은 그대 내면에 있는 사랑의 쎈타를 깨어나게 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달과 함께 매혹적인 몇 순간들을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었다면, 달빛은 그대의 내면에 있는 무엇인가를, 어떤 정수를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고, 그대는 사랑으로 채워지게 되었을 것이다.

기회는 어느 곳에든 있다.  존재는 놀라운 일로 가득 차 있다 - 그들에게 사랑을 주라.  그대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어떤 기회를 가질 때마다, 이것을 놓쳐 버리지 말라, 사용하라.  예를 들면, 그대가 길을 걷다가 길에 돌이 있으면 - 그것을 길옆으로 치워라.  이것은 전혀 돈이 들지 않는, 공짜로 오는 기회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의 삶 전체를 변형시킬 것이다.  이일은 아주 싸다!  어떤 것이 이보다 더 싼 명상이 될 수 있겠는가! - 그대는 길을 걷는다 그리고 돌을 본다; 그대는 이것을 들어올려 길옆으로 치운다.  누가 지나갈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돌에 치어 상처를 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대는 사랑의 행위로 돌을 운반했다. 

삶에서는 아주 작은 일들이 그대 내면에서 씨앗으로 배양되기 때문에 나는 그대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길에서 울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그냥 지나간다 - 그대는 몇 초 동안 기다려서 그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는가?

비폭력도 이것이 사랑을 통해서 생겨 나온 것이 아니면 궁극적인 종교가 아니다.

내가 그대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대가 누군가의 어깨에  손을 얹게 될 때 그대의 손을 통해서 그대의 가슴에 있는 모든 사랑을 그에게 보내라.  그대가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 그대의 손에 가슴 전체를 모아서 전부 내 보내라.  그대는 놀랄 것이다, 매직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가 누군가의 눈을 들여다 볼 때, 그대의 눈을 통해서 그대의 가슴 전체를 부어 넣으라 그러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대의 눈은 마술처럼 되어서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있는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대의 사랑이 깨어 날 뿐만 아니라, 그대가 매개체가 되어서 누군가의 사랑을 깨어나게 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사랑을 바로 하게 되면, 그 사랑이 수 천 사람의 내면에서 활성화 되게 된다.

친절함과 사랑의 쎈타가 깨어날 수 있는 기회라면 어떤 것도 놓치지 말라.  그 기회를 잡고, 그 열쇠를 기억하라:  매일, 이십 사 시간 동안 그대에게 보답이 돌아오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한, 두 가지 일 할 것을 기억하라.  그대는 하루 이십 사 시간 동안 무엇인가 보답이

돌아오기를 원하기 때문에 일을 한다.  매일, 정규적으로, 그대가 보답으로 무엇인가 얻기를 기대하지 않는 일을 하라.  이것이 사랑의 행위이고 그것들은 그대 내면에서 사랑이 탄생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대는 낯선 사람에게도 친절 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더 성숙하게 되면, 그대의 적이 되는 사람에게도 친절 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구별 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대는 궁극적인 순간, 그대의 사랑이 전 세계로 펼쳐 나가고,  그대의 가슴으로부터 사랑의 빛이 발산되는 그 순간을 위해서 그대 삶을 훈련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매일 적은 사랑의 행위를 할 것을 확실하게 하라.

미워하는 기회는 그냥 지나가도록 하라.  가끔은 그것들이 사용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의식적으로 사랑하는 기회를 가끔 가지라.  이것은 그대가 명상하는 과정에 대단히 빠른 속도를 가해 줄 것이다.


- 두 번째 열쇠는 자비다.  자비 역시 친절함의 형태를 갖는다, 하지만 내가 이것을 따로 논하는 이유는 이것은 약간 다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요소라고 내가 뜻하는 것은 그대가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그대는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갖게 된다.  그들은 지금 당장은 이곳에 있다:  그 중에 누구 한 명이 저녁에는 죽게 될런지 누가 알겠는가,  어느 날 우리는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있는 이 모든 사람들 의 얼굴들 가운데 어느 한 얼굴을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의 가슴은 그들에 대한 자비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로 지금 나는 정원을 가 보았다.  지금은 만개한 꽃들이 저녁이 되면 시들어 버릴 것이다.  그들의 삶은 아주 짧다:  그들은 아침에 꽃이 피어나고 저녁에는 가 버린다.  그대가 이 꽃들이 지금은 웃고 있지만 곧 시들어 땅에 떨어지고 저녁에는 흙과 섞인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면,  이것이 그들에 대한 자비로 그대에게 꽉 차게 되지 않겠는가?  깊은 이해가 있게 되면,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볼 때, 모든 것을 향해서 우리는 자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향해서 아주 깊은 동정을 느낄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아주 짧다, 이 삶은 아주 힘들다, 이 기회는 아주 희귀하다;  각자의 내면에 그처럼 많은 열정, 그처럼 많은 욕망, 그처럼 많은 아픔을...그러면서 아직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그리고 창작을 해가고 있다 - 이것이 얼마나 큰 자비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생은 짧다, 단지 몇 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다음 몇 순간도 확실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삶에서 이  몇 순간동안에 서로에 대한 자비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알지 못했고, 우리는 삶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 주위에 있는 모든 곳으로 자비를 펼쳐 나가라. - 사람들이 불행해하면, 그들의 불행에 더 보탬을 주지 말라.  그대의 자비가 그들의 불행을 덜어 줄 것이다; 단 한마디 그대가 보내는 자비의 말이 그들의 불행을 덜어 줄 것이다.

열매는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열매는 그대의 내면에서 만들어진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는 그대자신의 내면에서 이에 대한 수용성을 발달 시키라.  누군가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그의 사랑을 내주라.  지복을 원하는 사람은 그의 자비를 나누어 갖기를 시작하라.

그래서 자비는 각자가 명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발달 시켜야 할 하나의 감정이다.


- 세 번째 열쇠는 즐거움, 행복, 기쁨, 고민이 없는 일종의 지복감이다.  그대는 모두 괴로움으로 꽉 차있다.  그대는 슬프고 피곤한 사람들이다; 그대는 이미 죽은 사람들처럼 걷는다.  거기에는 에너지가 없다, 그대의 걸음에는 생기가 없다; 그대의 매일 매일의 삶에 아무런 생기가 없다.  인생이 얼마나 짧을는지 몰라도, 죽음이 얼마나 확실할 것인지 몰라도, 조금의 이해를 갖고 있다면 슬프지는 않아야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고도 웃으며 행복하다, 그러나 그대는 삶을 마주하고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긴 얼굴을 하고 앉아있다.  정신적인 여정에서는 활기 발랄함이 필요하다; 정신적인 여정에서는 지복감으로 가득 찬 기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항상 활달 하라. 슬픔은 단지 그대가 형성해 놓은 습관이다.  활달함도 역시 그대가 형성 할 수 있는 습관이다.  발랄함을 보조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어두움이 아닌, 빛으로 충만한 측면에서 삶을 보아야 한다.  삶을 보는 방법은 우리의 내면에서 발달시키려고 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삶의 어두운 면을 보지 말고, 삶의 밝은 면을 보라.

삶에서, 어디에서든 빛을 보라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그대 내면에도 빛이 태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즐거움이다.  그대는 죽음도 고통도 부정하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자신에게서 활달함과 지복감을 배양시키는 사람은 그의 명상에서 진보를 하게 될 것이다.


- 네 번째는 감사함이다:  감사함은 신성이다.

그대가 숨을 들이쉴 때 그대가 숨을 들이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

왜냐하면 숨이 들어오지 않는 순간 그대는 숨을 들어오게 할 수가 없다.  그대는 그대가 태어난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는가?  아니다, 이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의 탄생에서 그대는 어떤 의식적인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대의 결정이 아니었다.  그대가 받은 그 조그만 육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알고 있는가?  이것은 이 지구상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기적이다.  그대는 약간의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이 조그만 위장이 음식을 소화 시킨다 - 이것이 위대한 기적이다.

이처럼 위대한 기적이 하루 이십 사 시간 그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대는 이에 대한 고마움이 없다!

그대는 그대의 육체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대의 손에 키스를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대의 눈을 사랑 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 그대들 중에서, 그의 눈을 사랑하고 그의 손에 키스를 하고, 그의 지식이 없이 그리고 그대가 참석하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놀라운 일에 일어나는 것에 감사하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선은 그대의 육체에 감사하라.  자신의 육체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육체에도 감사 할 수 있다.

이 육체란 무엇인가?  이 육체는 다섯 가지 요소로 만들어져 있다 - 그 육체에 감사하라, 이 다섯 가지 요소에 감사하라.

어느 날 태양이 죽어 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단지 태양만이 죽는 것이 아니다, 삶은 태양에 의해서 지탱되기 때문에 삶 자체도 죽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해변가에 앉아 있다:  그대의 육체의 칠십 퍼센트가 해양의 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 육체 내, 물이 갖고 있는 소금의 분량까지도 대양의 것과 똑 같다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바닷가에 앉아서, 기억하라, 그대 역시도 내면에 대양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대 내면에 있는 대양을 위해서 대양에게 감사하라, 그리고 그대 내면에 있는 태양을 위해서 햇빛에 감사해야 하고, 그대가 쉬고 있는 숨을 움직여 주는 바람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를 만들어 준 하늘과 땅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감사이며, 신성에 대한 감사다.

이러한 감사함이 없이 종교적으로 될 수 없다.  일단 그대가 이 감사함을 끊임없이 경험하기 시작 할 때,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 이 감사함이 그처럼 큰 평화로서, 그처럼 큰 신비로서 그를 충만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한 가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 모든 것이 주어질 만큼 가치가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대가 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감사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대의 감사함을 표현하라. 감사함을 발달시키는 방법들을 찾으라, 그러면 그대의 명상은 이를 통해서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명상 뿐 만 아니라, 그대의 전체 삶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그대의 삶은 아주 달라 질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아주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

다른 많은 것이 더 있지만 이 네 가지로 충분하다.  그대가 그것들을 명상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따라 올 것이다. 

그대가 이 세 가지, 육체, 생각들, 감정들을 순수하게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새롭고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일어 날 것이다.



제 6 장 :     육체와 영혼:

              과학과 종교



제 7 장 :      의식의 빛


나는 명상의 기초를 이루는 외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이제 나는 명상의 중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명상의 기본적인 기초는 육체, 생각 그리고 감정의 진정한 자연성을 순수하게 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단지 이 정도만 일어나도 그대의 삶은  매우 지복을 가진 삶이 될 것이다.  다만 이 정도만 일어나도 그대는 그 너머에 있는 것과 연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너머에 있는 것과의 만남이지, 이것과의 합일은 아니다.  순수함의 기초는 그대를 신성을 향해서 돌아가도록 할 것이며 그것에 초점을 맞추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비어있음의 상태 하나만으로 그대는 신성과 하나가 될 것이다.

처음에는 진리를 알게 되는 주변에 그대가 있게 되고, 중앙에서 그대가 있을 때 그대는 진리가 된다.


첫 번째 단계는 육체, 마음, 감정들을 순수하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비어있음이다.  여기에도 역시 세 단계가 있다: 육체, 마음, 그리고 감정의 층이 있다.

육체 없음은 육체 동일시의 반대이다.  그대는 육체와 동일시한다.   만약 그대에게서 그대가 육체라는 느낌이 사라지면, 그대는 육체 없음으로 될 것이다.  그대의 육체 동일시가 끊어지면,  육체 없음이 일어난다.

인간성의 자각 과 동일시를 버리게 되면, 그대가 육체라는 느낌이 없어진다.  그것이 육체 없음이다.  그러나 그대는 동일시를 버리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버릴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육체가 순수해 지면 질수록, 육체의 동일시를 버리는 것이 더 쉬어질 것이다.  육체가 순수한 상태일수록, 더욱 빨리 그대는 그대가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왜 육체 순수함이 근본이며,  육체 없음이 이의 궁극적인 열매가 되는 이유다.


- 첫째로,  그대는 어떻게 육체가 아님을 배울 수 있는가?

그대는 이것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자거나, 걸어 갈 때 그대는 기억하도록 노력하라,  조금의 바른-마음 갖기가 있다면,  육체의 기능에 조금만 깨어 있다면, 그대는 ‘비어있음’을 향해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대가 길을 걸을 때, 그대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곳에 걷고 있지 않은 누군가가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대는 걷고 있다, 그대의 손과 발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대 내면에 있는 무엇인가가 전혀 걷고 있지 않다, 그대가 걷는 것을 그냥 보고 있다.

그대가 손이나 발에 어떤 아픔이 있게 될 때, 깨어 있으면서 내면을 들여다 보라 - 그대가 다친 것인지, 또는 그대의 육체가 다친 것인지, 그리고 그대가 그 아픔과 동일시하고 있는지?  육체에 어떤 아픔이 있을 때, 그 아픔이 그대에게 일어나는지 또는 그대가 단순히 아픔을 주시하고 있는지, 그대가 아픔의 증인인지를 알도록 하라.

그대가 배고픔을 느낄 때, 그대가 배가 고픈 것인지, 또는 그대의 육체가 배가 고픈 것인지 그리고 그대는 단순히 이것을 주시하고 있는지를 깨어 있으면서 들여다 보라.  그리고 행복이 있을 때, 이 행복이 정말로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바라보고 느끼라.

그대가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걷거나, 자고 있거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일어나는 일들이 정말로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들은 정말로 그대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아니면 그대가 단지 증인인지?

육체에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든지 그대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고통과 아픔 속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육체와의 동일시다.  그리고 행복을 갖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그대가 육체와의 동일시를 끊고 그대는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르게-기억함이 필요하다. 육체 활동의 바르게-기억함, 바른-의식, 육체 활동의 바른-관찰이 필요 된다.  이것이 과정이다:  육체 없음은 육체의 바른-관찰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다.

육체를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대가 밤에 잠자리에 들 때, 그대의 육체가 침대로 가는 것이며,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아침에 침대에서 나올 때,  육체가 침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대가 잠을 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육체가 잠을 잔 것이다.  그대가 먹을 때는, 그대의 육체가 먹고 있다는 것을 알라, 그리고 그대가 옷을 입을 때는, 옷은 다만 육체를 가리는 것이지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라.  그리고 누군가가 그대를 다치게 할 때,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대는 그대가 아닌, 육체가 다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계속해서 생각나도록 하면, 어떤 점에서 폭발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동시성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그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대는 더욱더 육체를 잊는다.  꿈속에서 그대는 육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깊은 잠에서,  무의식의 상태에서, 그대는 전혀 육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할 때, 육체와의 동일시가 점차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아침에, 그대가 갑자기 일어났을 때, 내면을 보라, 그대는 육체의 동일시 역시도 깨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육체와의 동일시를 끊는 것을 경험하는 방법이 있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이 경험을 한다면,  그대가 동일시를 끊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 몸을 이완시킨 다음에 자신이 죽은 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내면에서

    상상한다.  화장터에서 자신의 육체가 사라지는 과정을 보는 경험 -

시체가 사라지면서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불꽃도 공중으로 사라지고 오로지 재만이 남는 점까지 그대의 상상이 미치면, 즉시, 완전한 의식을 갖고, 그대 자신 내면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들여다보라; 바로 그 순간에 동일성이 완전히 끊어진다.

이러한 경험을 많이 한 후에, 그대가 일어나거나,  걸을 때,  이야기 할 때,  그대는 그대가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상태를 육체 없음의 상태라고 부른다.  누군가 그 자신을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 육체는 없어진다.

그대가 이것을 항상 하게 되면, 하루에 이십 사 시간 동안 - 걷거나, 일어나거나, 앉아있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그대가 육체가 아니라는 것에 깨어 있으면 - 육체는 단지 비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  이것은 아주 희귀하다,  아무 것도 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육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아주 희귀하다.

그대의 육체, 그대의 생각과 그대의 감정이 순수화되었고, 그대에게 육체가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  많은 변화가 그대의 삶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 할 것이다.  그대의 모든 잘못, 그대의 모든 무의식적인 행동들은 육체와 연결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대가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대의 삶에서 고통이 있을 가능성은 더 이상 없게 된다.

이것이 정신적인 수련에 있는 첫 번째 단계다:  그대는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배워야한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틀림없이 경험 할 것이다.


- 정신적인 수련의 두 번째 요소는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다.  내가 이야기 한 것처럼 육체 없음은 육체의 바른-관찰로부터 일어나며,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는 그대의 생각의 바른-관찰로부터 일어난다.  정신적인 수련에 있어 근본적인 요소는 바른-관찰이다.  이 세 가지 단계에서 그대는 육체를, 마음과 감정을 바른-의식과 바른-관찰을 갖고 보도록 해야 한다.

그대 의식을 통해서 흐르는 생각의 흐름의 관찰자가 되라.  마치 누군가가 강변에 앉아  강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듯이, 그대의 마음 곁에 앉아서 바라보라.  아무 것도 하지 마라, 간섭을 하지 마라, 어떤 식으로도 그것들을 스톱시키지 마라.  어떤 방법으로도 억제하지 말라.  만약 생각이 오면 스톱을 시키지 말라, 만약 오지 않으면 억지로 오도록 노력하지도  말라.  그대는 단순히 관찰자가 되라.

그런 단순한 관찰을 통해서 그대는 생각들을 보게 되고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대는 분리 된다 - 왜냐하면 그대는 생각을 지켜보는 자가 생각으로부터 분리되고, 그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이것을 의식하게 되면, 그대에게 더 이상 걱정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상한 평화가 그대를 감싸줄 것이다.  그대가 모든 종류의 걱정 가운데 있게 되더라도 걱정들은 그대의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대가 생각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대는 생각들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생각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이 생각들의 생명은 점 점 더 약해지기 시작 할 것이다.  생각들의 힘은 그대가 그것들이 그대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사실에 놓여있다.  아무런 생각도 그대의 것이 아니다.  모든 생각들은 그대와 다르고, 그대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대는 그것들의 주시자일 뿐이다.

그대가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그대의 내면에는 두 개의 흐름이 있게 될 것이다: 하나는 행위자이고,  다른 하나는 단지 바라보는 자이다 - 바라보는 자가 그대이고, 행위를 하는 자는 그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대가 완전히 깨어 있으면서 내면을 들여다보면, 생각들은 멈춘다. 

그리고 생각들이 멈추었을 때, 그대는 행위자와 보는 자가 다르다는 것을 본다. 생각을 바라보는 자가 그대의 깨어있는 지성이다. 그대의 지성을 깨어나게 하라. 어떻게 깨어나게 하는가는 내가 말했다 - 그대의 생각을 의식을 갖고 바라보는 것.  그대가 육체의 행위를 바라보면 육체가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질주하는 생각들을, 생각의 과정을 바라본다면, 생각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대의 감정들을 가까이 관찰 하게 되면, 그때는 감정들이 사라질 것이다.


-  나는 감정들을 순수하게 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미움의 자리에 사랑이 오도록 하고, 적대심의 자리에 우정이 오도록 하라.  이제 나는 그대에게 이 진리를 의식하라고 말한다.

사랑을 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뒤에 하나의 차원이 있는데, 사랑하지도 그리고 미워하지도 않는, 그것은 다만 의식이다.  이것은 단순히 의식이다.  이 의식은 때로는 미움이 일어나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사랑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의식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미움 뒤에 있다. 그대의 육체, 생각들과 감정들 뒤에 있는 것, 모든 것의 뒤에 있는 것, 바로 이것이 그대의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그대의 감정들을 바라보는 자가 되라.  결국은 그대는 오로지 순수하게 바라보는 자가 될 것이다.  그 순수하게 보는 것이 지성이다.  우리는 순수하게 보는 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순수하게 보는 것을 의식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요가나 다른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내면으로의 여정의 기본적인 특질은 바른-관찰이다, 육체의 행위, 생각의 과정과 내면의 감정의 흐름에 대한 바른-관찰이다. 이 세 개의 층을 통과한 후 보는 자가 된 사람은 다른 쪽에 있는 해안에 도착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해안에 도착한다는 것은 목적지에 거의 도착을 한 것이다.  누군가 이 세 개 중 어느 하나에 잡혀 있는 사람은 아직 이 쪽 해안에 잡혀 있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목적지에 도착을 하지 못한 것이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그대는 일생동안 계속해서 노를 저을 수 있다,  끝도 없는 많은 생을.  그리고 많은 생을 산후에 서늘한 바람이, 또는 어떤 일깨움을 주는 생각이,  어떤 지혜가 그대를 터치했을 때,  몇 줄기의 빛이 그대를 터치하고 그대가 깨어나서 보았을 때,  그대는 일생을 노를 젓는데 낭비를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대는 그대가 시작했던 같은 해안에 아직도 밧줄에 매여져 있었다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보트를 풀어야 하는 것을 잊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보트를 푸는 방법을 배우라.  배를 젓는 일은 쉽다, 하지만 배를 푸는 일은 아주 어렵다.  보통은 배를 풀어내는 일이 쉽고 배를 젓는 일이 더 어렵다.  하지만 삶이라는 강줄기에서는, 묶여있는 배를 풀어내는 일이 아주 어렵고 노를 젓는 일은 쉽다.  라마크리쉬나는 한때 말했다, “그대의 보트를 풀고, 돛을 올리라 그러면 신성의 바람이 그대를 데려갈 것이다 - 그대는 노를 저을 필요도 없다.”

그가 말한 것은 옳다 - 그대가 배를 풀면 그대는 이미 신성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 바람이 그대를 멀리 있는 해안으로 데려 갈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저 편에 있는 해안에 닿지 못한다면 그대는 지복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 할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대는 보트를 풀어야한다.

명상은 그대가 보트를 푸는 일이다.  왜 사람들은 그들의 보트를 풀지를 못하는가?  그들은 술에 취해 있고, 그들은 무위식적이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찬바람을 느꼈을 때, 그들은 제 정신으로 돌아오고, 강뚝에 아직도 매여 있는 보트를 발견한다. 

내면의 정신적인 수련은 단 한가지다.  이것은 바르게-기억함 또는 바른-지성 또는 바른-의식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 세 가지의 비어있음이 경험되면 이것은 사마디, 깨어남이다. 사마디은 진리로의, 자신으로의, 신성으로의 문이다.  사마디에 깨어 있는 사람은, 세상이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은 이 벽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진다는 것은 이러한 벽들이 더 이상 벽들이 아니고 그대가 더 이상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이 나뭇잎이 움직일 때, 그대는 나뭇잎뿐만 아니라 이것을 움직이는 생명의 힘 역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 그대는 바람뿐만 아니라 바람을 불게 만드는 힘 역시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흙의 각 각의 입자들이 죽어야 할 것으로 뿐만이 아니라, 또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세상이 사라지고 신성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산 가까이 있으면서,  그리고 계곡에 있으면서 묻는다, “누가 이러한 계곡과 이러한 나무들을 만들어 내었을까?”  그대는 그대 자신을 경험 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에 대해 물어 볼 것이다.  그리고 일단, 누가 이것들을 만들었는지를 묻지 않는 그대를 알게되면, 그대는 알 것이다 - 이것은 존재 자체라는 것을.  창조자는 없다.  존재자체가 창조자이다.  그대가 눈이 있다면 그대는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대는 창조 자체가 창조자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이 거대한 세상이 신성이 될 것이다.  신성은 세상과 반대되는 곳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태도가 사라질 때, 신성이 나타난다.

갈망하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 용기를 가진 자는 그의 삶이 변형되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그는 진보 될 것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큼 위대한 도전이 아니다.  그리고 힘과 에너지를 가진 지성의 사람이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은 모욕적이다.  모든 개인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 또 자신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깨달음을 알기 위해 결심을 해야 한다. 이 결심을 갖고 이러한 기초를 사용하면 누구든지 성공을 할 가능성이 있다.



제 8 장 :  진리: 그대의 생득권


질문:  진리란 무엇입니까?  이것을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현인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첫째로 현인이 되는 것은 각 개인이 가진 잠재성이다.  누군가 이 잠재성을 현실로 변형시키지 못했다면 이것은 다른 일이다.  하나의 씨앗이 하나의 나무로 자라나지 못했다면 이것은 다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깨달음을 얻는 것이 단지 몇 몇 사람들의 특별한 특권이라는 이 아이디어를 그대 마음으로부터 떨어버려야 된다.  누군가가 이런 아이디어를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들의 에고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에고를 충족시키는 방편이다.  그렇지 않고는, 모든 사람들이 현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경험 할 공간과 기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두 번째로  진리는 부분적으로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로서 경험된다.  이는 이것이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완전하게 경험되는 것이며, 하나의 폭발로 경험되는 것이다.

진리를 향해서 점차적으로 가까이 움직여 가는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대가 진리에 도달했을 때는 이것은 전체적이다.  그대는 진리를 향해서 가까이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진리를 얻는 것은 전체적이다, 결코 부분적이지 않다.  이는 절대로 파편적이 아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명상의 소개로 일련의 단계들을 주었다:  그대는 그것들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감정들의 비어있음’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단계에서, 그대가 감정들의 이 비어있음, 역시도 뛰어 넘을 수 있을 때, 그대는 진리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 때  진리는 자체의 완전함으로 알려진다.


 - 세 째로 진리란 무엇인가?  이것은 언어로는 말 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까지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말해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 미래에도 이것은 결코 말해 질 수 없다.  언어란 서로의 의사를 전달 할 목적으로 발달되었다, 이것은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왜 내가 그대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 할 수 없는가 하는 이유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대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말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그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진리를 말했다면, 그는 그 자신과 그대를 속이고 있다.  진리를 묘사 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 진리를 어떻게 경험 할 것인지를 그대에게 말 할 방법은 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 그 과정은 묘사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말해질 수는 없다.  진리를 얻는 방법들은 있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정의는 없다.


질문:   바라보는 자가 된 후 생각하는 그것은 누구입니까?


그대가 바라보는 자가 되면 거기에는 생각이 없다.  그대가 생각하는 순간에, 그대는 더 이상 바라보는 자가 아니다.  나는 정원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자가 된다,  나는 꽃을 바라보고 있다 -  만약 내가 단지 바라보기만 한다면, 나는 바라보는 자, 증인이다, 그런데 내가 생가하기를 시작한다면 그때는 나는 더 이상 증인이 아니다.  내가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꽃은 더 이상 내 눈앞에 있지 않을 것이다 - 생각의 흐름이 나와 꽃 사이에 들어 올 것이다.  내가 꽃을 볼 때 나는 말한다, “꽃이 아름답다,” 나의 마음이 “꽃이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 순간에 나는 꽃을 보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마음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않는다 - 얇은 커튼이 둘 사이에 있다.  그리고 내가 “나는 이 꽃을 전에 보았다, 이 꽃은 눈에 익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 꽃은 내 눈으로부터 사라진다.  지금 나는 내가 이것을 보고 있다고 상상 할 뿐이다.

생각은 하나의 파도다, 생각은 하나의 병이고 생각은 흥분이다.  그대가 생각의 흥분을 잃었을 때 그대는 바라볼 수 있다.  그대가 바라볼 때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과 증인하는 것은 반대다.

이곳에서 하고 있는 경험에서, 그대는 생각들을 아주 약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그곳에 생각이 없고 다만 생각하는 자만이 있는 상태로 온다.  생각하는 자라고 내가 뜻하는 것은, 생각을 하는 사람 - 단지 그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지 않을 때, 보는 것이 일어난다.  이것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생각하는 것과 바라보는 자는 두 가지는 반대되는 것이다.  눈을 가진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이 집을 나가고 싶다면, 나는 “문이 어디에 있나?”하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가졌다면, 무엇에 대해 생각을 하겠는가?  나는 나가는 길을 볼 것이고, 나가면 된다.

조금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은,  더 많은 생각을 한다.  세상은 그들을 생각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장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더 많이 보게되면, 그들은 적게 생각을한다.

그대가 이곳에 있지만, 순간이나마 생각이 없는, 순수한 순간을 경험 할 수 있다면, 그때 그대는 그대의 삶에 있어서 아주 귀한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그 방향으로 움직이라 그리고 이것을 성취하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의식만이 있고 생각이 없는 순간을 만들라. 그것이 그대의 가장 큰 열망인, 그 순간을 만들라.


질문 : 에고라는 에너지를 무엇으로 바꿀 수 있습니까?


나는 그대에게 분노의 에너지가 일어나면, 이것을 창조적으로 변형시키라고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쎅스 에너지가 있으면 그것 역시 변형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에고는 분노나,  쎅스나 욕망이 에너지인 것처럼 똑 같은 식으로의 에너지가 아니다.  분노는 가끔 일어난다,  쎅스에 대한 충동도 단지 때때로 일어난다,  탐욕도 역시 그대의 의식을 가끔 잡고 있다.  하니만 에고는 단지 가끔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항상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에너지가 아니다, 이것은 그대의 상태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이것은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항상 그대와 함께 있다, 이것은 그대의 모든 행위들 뒤에 서 있다.  많은 것이 이 때문에 온다 그러나 에고 자체는 항상 그곳에 있다.  분노는 에고 때문에 온다.  그대가 이기적이면 그대는 더욱더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기적이면 그대는 더욱더 명예에 대한 탐욕이 있게 될 것이고, 권력에 대한 더 많은 탐욕과 굶주림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 이기적이면, 에고 때문에 이런 일들이 그대에게 일어날 것이다.  에고는 그대 의식의 상태이다; 그리고 그곳에 무지가 있는 한, 그곳에는 에고가 있다.  그러나 앎이 일어나면 에고는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는 그대의 인간성을 경험한다.

에고는 그대의 인간성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덮개다.  이것은 에너지가 아니다, 이것은 무지다.  많은 에너지들이 이러한 무지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들을 파괴적으로 쓰면, 에고-상태가 강해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일어나는 에너지를 창조적인 방법으로 쓰게되면 에고의 힘은 점 점 더 약해져 갈 것이다, 에고-상태는 약해 질 것이다.  그대의 모든 에너지가 창조적으로 쓰여지면, 어느 날 에고는 사라져 갈 것이다.  그리고 에고의 연기가 사라질 때, 그 뒤에서 그대는 그대 인간성의 불꽃을 만나게 된다.  에고의 연기가 그대의 영혼의 불꽃을 둘러싸고 있다.  무의식이 투명해지고, 에고의 연기가 사라져 버릴 때,  모든 층에 있는 ‘나’가 사라질 때, 그리고 ‘나는’ 이라는 아이디어 역시도 사라졌을 때, 그대는 내면의 깊이를 경험한다.

그곳에는 그대가 있던지 신성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그대가 있는 한, 신성은 있을 수 없다.  그대가 사라졌을 때, 신과 같은 것이 있게 된다

에고는 단지 무지다.  그리고 이 무지 때문에 그대의 많은 생명 에너지가 잘못 쓰여지고 있다.  그대가 그 에너지들을 바르게 사용한다면 에고는 어떤 영양분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고, 천천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한 세 가지 순수함을 계속해서 그대가 경험하게 되면, 어느 날 그대는 에고가 사라진 것을 발견 할 것이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에고는 사라질 것이다.  분노의 에너지는 그곳에 새로운 형태로 있게 될 것이다.  에고가 사라지면, 뒤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분노나 쎅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변형이 된다.  분노라는 에너지는 남아 있게 될 것이지만, 이것은 다른 형태를 갖게 된다.  이것은 자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 -에너지는 같다.


질문 : 왜 영혼이 존재와 하나가 될 필요가 있습니까?


“영혼이 지복 속으로 사라 질 필요가 무엇입니까?” 라고 그대가 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영혼이 건강해야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라든가,  아니면 “영혼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야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라고 그대가 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영혼이 신성으로 용해되어야 되는 단 한 가지 필요성은,  삶이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는 절대로 충족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고통은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삶은 항상 지복을 욕망 한다.  그리고 고통이라는 것은 신성과 분리되어 있다.  그대가 신성과 하나가 되었을 때, 삶은 지복이 된다.

그래서 문제는 신이냐 또는 신성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가 고통으로부터 지복으로 가느냐, 어두움으로부터 그대 내면에 있는 빛으로 가느냐 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무도 고통 속에서 만족 될 수 없다.  고통이란, 그 속성이, 그대를 그대 자신으로부터 떼어 내 놓는다.;  지복은, 그 속성이, 그대를 그대 자신에게로 불러 들인다  세상은 고통이며, 신성은 지복이다.  신성과 하나가 될 필요는 종교적인 필요가 아니다; 신성과 하나가 될 필요는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신에게는 ‘no’ 라고 말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복감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대의 탐구는 지복감이다.

각 개인은 자신의 필요 때문에 자유롭기를 원한다.  그가 어떤 필요에도 묶이지 않고,  그저 무한한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얻어 질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자유로운 순간을 염원한다.  아무 것도 가져 갈 것이 없고 아무 것도 뒤에 남겨질 것이 없다.  그 무한한 것이 신이다.

신이란 궁극적인 그대 의식의 지복 상태이다.

그대 가슴에서 뛰는 맥박은 전체 존재계의 맥박과 하나다.  그대의 호흡이 존재계와 하나가 되고, 그대의 생명력이 존재와 하나가 되어 뛸 것이다.  그대와 존재계 사이에는 경계가 없고 다른 것이 없다.

그럴 때 그대는 안다, “나는 신이다.” 라는 것을.  그럴 때 그대는 그대의 ‘나’라고 알았던 것이 전체 존재계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존재다” - 이것을 나는 신성에 대한 경험이라고 부른다.



제 9 장      한번에 한 발자국씩


이 삼일 동안 그대는 진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고, 이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대의 결심이 강하고, 그대의 열망이 깊다면,  이 삼일 간 약간의 갈증을 풀었던 그대의 목마름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내가 그대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몇 가지는;  첫째로, 신성을 경험하고자 하는 그대의 열망이 내면에서 불꽃이 되었다면,  빨리 그 불꽃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에 있는 열쇠 중 하나다:  그대가 무엇인가 나쁜 것을 하고자 할 때는 스톱을 하고 연기하라, 하지만 그대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하고자 할 때는 그치지 말고 연기하지 말라.

좋은 생각이 그대 마음에 일어났다면 즉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내일이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기 전에, 어떻게 죽음을 넘어 선 무엇인가를 경험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죽음은 어느 때라도 올 수 잇다, 이것은 어는 순간에도 올 수 있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올 수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로 연기하지 말라.  그대가 무엇이 옳다고 느끼면, 즉시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라.

그래서 명상하는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의 현실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는 죽음이 어느 순간에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해야한다:  “내가 오늘 밤에 잠을 자러 가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나의 마지막 밤이 될는지 모른다.

나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밤 나는 미완성인 상태로 무엇을 남겨 놓고 잠자리에 들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온다면,  환영한다.“


나는 단지 두 가지 점에 대해 말했다:  삶은 순수해야하고 의식은 비어 있어야 한다.  사실, 나는 한가지만을 말했다 - 의식이 비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삶의 순수함은 이를 위한 기초일 뿐이다.

의식이 비어있을 때, 그 비어있음은 그대에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주고 숨겨져 있는 존재의 비밀을 벗겨준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나뭇잎을 나뭇잎으로 보지 않는다...나뭇잎에 있는 생명이 그대의 눈에 보이기 시작 할 것이다.  그리고 대양에 있는 파도에서 그대는 파도를 보지 않는다; 그대는 파도를 만드는 것을 보기 시작 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대는 사람들의 육체를 보지 않는다, 그대는 그들의 육체에서 생동하고 있는 삶을 느끼기 시작 할 것이다.  그대가 느끼기 시작하는 이 경이와 기적을 묘사 할 방법은 없다,

나는 그대들이 이러한 신비를 향해 움직이도록 초대했다, 그리고 이 신비를 체험하도록 몇가지 열쇠를 주었다.  이 열쇠들은 영원한 것이다.  이 열쇠들은 내 것도 아니며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 열쇠들은 어느 경전이나 종교 이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존재 할 것이다.

그대가 불행하다 그러면 그대가 불행하다는 것을 의식하라, 이 고통을 참지 말라, 이와 함께 살아가지 말라.  고통을 대항해 일어서서 이것을 없앨 무엇인가를 하라.  평범한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는 그는 이것을 잊기 위한 길을 찾는다, 그리고 명상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는 그는 고통을 파괴시킬 길을 찾는다.

아픔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일종의 무의식이다.  하루 이십 사 시간 동안 그대는 그대의 아픔을 잊을 방법을 찾고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음악을 듣고, 술을 마시고, 카드놀이를 하고, 도박을 하던지 자신을 잊기 위한 다른 어떤 짓에 몰두되어 있으면서, 그가 내면에 그처럼 많이 갖고 있는 아픔을 잊으려고 한다.

그대의 상처들을 숨기지 말라, 그것들을 벗겨내고, 그대가 가진 아픔과 얼굴을 마주하라.  그리고 이것을 잊으려고 노력하지 말라 - 이것을 벗겨놓고 이것을 알고, 그리고 이것을 없앨 방법을 찾으라.   아픔을 없애려고 열심히 노력하며,  이를 잊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만이 삶의 신비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자신을 두려워한다.

내가 거론했던 열쇠들은 그대를 그대자신에게 소개 시켜 줄 것이고 이러한 두려움을 파괴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이 지구상에 완전히 혼자 있는다 해도, 그대는 지구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만큼, 그만큼 행복한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오직 혼자 있는 지복감을 경험한 사람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 왜냐하면 죽음은 그대를 완전히 혼자 있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삼일 동안 명상에 대해 논한 것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혼자 있게 되는, 완전히 홀로 있음으로 움직여 가는 경험이다.  그대는 아무도 없는, 단지 그대만이 있는 중앙으로 가야만 한다.

이 중앙에 있는 쎈타는, 믿기 어려운, 그런 곳이다.  누군가 이 쎈타를 경험 한 사람은 대양의 밑에 있는 그 깊이를 경험 할 것이다.  그대는 단지 대양의 파도를  떠다니고 있다, 그대는 이러한 파도들 밑에 숨어 있는, 어떤 파도도 가 본적이 없는, 어떤 파도도 들어간 적이 없는, 무한한 깊이에 숨겨져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대 내면에는 많은 깊이들이 있다.  홀로 일 때, 그대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대 자신에게로 걸어 갈 때, 그대는 더 깊이 그대 자신에게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 자신으로 더욱더 깊이 들어 갈수록,  그대의 바깥 삶에서 더욱더 높은 것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은 가장 큰 신비다.

나는 그대에게 그대가 있는 곳에서 떠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그대인 것으로부터 변화되라고 말한다.  나는 그대가 있는 곳에서 도망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약한 사람만이 도망을 한다.  나는 그대가 변화되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 변화가 진정한 것이다.

그대의 의식의 상태를 알도록 하라, 그리고 이것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하라.  어느 한 국면을 택하라 그리고 거기에서 작업을 시작하라.  한 방울, 한 방울로 대양은 충만해 질 수 있다.  한 치씩, 한 치씩 걸으라, 신성이 발견 될 것이다.  단지 한 번에 한 발자국 씩.  나는 그대에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요청하지 않는다.  신성은 한 번에 한 발자국 씩 내딛는 것으로 간단하게 발견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에게 능력이 없다고,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

그대가 얼마나 약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한 발자국을 내딛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가장 능력 있는 사람도 한번에 한 발자국 이상을 내 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발자국을 내 딛으라. 그리고 나서 다음, 다시 한 발자국을 내 딛으라.  그리고 누군가 계속해서 한번에 한 발자국만을 내 딛는 사람은 무한한 거리를 커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한 번에 한 발자국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는 사람은 아무 곳에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의 퍼나르기를 금지합니다.

* 이 글의 완역본은 국내에 나와 있습니다.(프라폴라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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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nk0127

    이 글은 '명상의 길'이라는 오쇼의 책 중 일부분 입니다.
    오쇼 액티브 명상을 처음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지침서, 혹은 입문서로 필독하시면
    많은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11 개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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